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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DAILY/영화 MOVIE

컨택트 감상평 / Arrival Review (2016)

 

컨택트

ARRIVAL

2016

 

 


 

개봉일 : 2017. 02. 02.

감독 : 드니 빌뇌브

주연 : 에이미 아담스(루이스 역), 제레미 레너(이안 역)

 

 원제는 도착이라는 뜻을 가진 Arrival이지만 한국에서는 접촉이라는 뜻을 가진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에 의문을 가졌고, 나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게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고나서 컨택트라는 제목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얘기하고자하는 큰 줄기들 중 하나가 "소통"이라는 점에서 컨택트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도 괜찮은 듯 싶다. Arrival이 보다 객체지향이고 피동적인 느낌인 반면, Contact는 보다 관계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원제를 굳이 바꿔야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에 대한 평 이전에, 한글 자막에 대한 불만을 얘기해야겠다. 몇몇 번역은 너무 의역을 한 나머지 뉘앙스가 이상하고, 몇몇 번역은 너무 직역한 나머지 의미전달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이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한글 번역이 성의가 없다. 차라리 인터넷에 떠도는 불법판 자막이 더 나을 지경이다.

 

 이 영화는 SF로 분류되어 있지만, 일반적인 SF영화를 생각한다면 매우 지루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떤 과학적인 것이나 외계기술 혹은 외계종족에 대한 실체를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외계인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의 이야기이다. 어떤 박진감 넘치는 전투장면도 없고, 정신없이 화려한 폭발 같은 것도 없으며 베일에 휩싸인 외계종족에 대한 미스터리 같은 것도 없다. 외계인이 나오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감독의 전작인 시카리오를 떠올리면 얼핏 의문이 든다. 시카리오에서 보여줬던 장면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체적이었다. 때론 너무 현실적이어서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인 시카리오이다. 감독은 시카리오에서 지극히 실체적인 것들을 통해 선과 악의 대립을 이야기했고, 그 와중에 완성되는 인간의 자아를 얘기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평이다.) 컨택트는 시카리오와는 전달법이 다르다. 시카리오가 실체에 집중했다면 컨택트는 관념적인 것을 얘기한다. 시카리오가 개인의 자아를 이야기했다면, 컨택트는 인류를 이야기한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트랜스포머나 인디펜던스 데이를 기대한다면 매우 실망하고 졸음과 맞써야할 확률이 높다. 물론 연출력은 시카리오와 마찬가지로 몰입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번 흐름을 탄다면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초반부 영상은 루이스(여주인공)가 딸을 키우는 과정과 그 마지막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루이스에게 뭔가 큰 일이 닥쳤고, 그 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을 치유해가는 모습을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함정이다. 도입부 이후 루이스의 모습에서 과거의 아픔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모습, 미지의 것에 흥미를 느끼는 모습 등은 영락없이 평범한 학자의 모습이다. 이후 지구에 찾아온 셸에 들어가면서부터 루이스와 딸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은 점차 비중이 늘어난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듯한 연출이지만, 이내 관객과 루이스는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이 영화의 두 가지 큰 축은 시간언어이다. 주인공인 루이스가 언어학자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언어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는 금방 드러난다. 반면 다른 주인공인 이안(남주인공)은 이론물리학자이다. 각각 언어와 과학을 대변하며, 감성과 이성을 상징한다. 이 요소들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인류가 발전했다는 점에서 이안이 의미하는 바 또한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안이 다소 소외되는 것 같은 흐름은 이 영화에서 몇 안되는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언어에 대한 이 영화의 시각은 초반부 루이스가 적은 책의 내용을 통해 옅볼 수 있다.

 

 "언어는 문명의 기반이고, 사람들을 모으는 끈이며, 갈등이 생길 때 가장 먼저 꺼내는 무기이다."

 

 위 문장은 이 영화에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외계의 셸이 도착했을 때, 전세계 각국은 언어학자들을 통해 외계인과 대화를 시도했고, 그 내용을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고받았다. 몇몇 호전적인 국가들은 외계인의 언어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국가들의 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갈등은 매우 사소한 언어의 해석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갈등의 해결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화 초반에 캥거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호주에 처음 도착한 네덜란드인들이 주머니에 새끼를 담고 돌아다니는 동물에 대해 물어보자 원주민들이 '캥거루'라는 대답을 했다. 네달란드인들은 동물 이름이 캥거루라고 이해했지만, 사실 캥거루는 원주민 언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것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예전부터 와전되는 이야기다. 역사적인 근거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에서 언어를 어떤식으로 활용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의 언어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가."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제한을 받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도 없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온전히 글로 전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류보다 발달한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분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나오는 프로토스와 같은 종족이다. 그들은 인류의 언어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입도 퇴화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속 루이스는 외계인들이 뭔가 소리를 냈다고 하자 입이 있는지 묻는다.) 프로토스는 신경삭을 통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로 발생하는 왜곡이나 오류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최후에는 그것이 재앙으로 변했지만.) 컨택트에 나오는 외계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나의 문자에서 하나의 의미를 전달한다. 표음문자가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 하나의 음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표의문자의 한계도 명확하다. 의미만큼 문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문자가 무한대에 가깝다.) 때문에 컨택트의 외계인은 원형의 문자를 사용한다. 원의 주변 모양에 따라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원형 문자는 그 자체로 의미전달에 있어 완벽한 형태를 띈다. 더불어 이것은 하나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에 이야기할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새롭게 생각할 것들이 많은 요소다.

 사실 컨택트의 외계인이 실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자가 실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다. 이 원형의 문자가 가지는 의미는 실체적인 결과물이나 예시가 아니라 "기존 언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 그 자체이다. 언어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지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에 매어있다. 특히 그 순서에."

 

 도입부 루이스의 나레이션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인간의 언어는 시간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순서를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 표현으로 인해 인간의 사고는 시간에 얽매이게 된다. 어떤 언어든 '과거형-현재형-미래형'이라는 기본틀이 자리잡고 있다. 예외적으로 몇몇 구간이 없는 언어들도 있으나 타 언어로 번역이 힘들다. 대부분의 언어가 해당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컨택트의 외계언어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언어이다. 원형 구조를 통해 시작과 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외계언어가 의미하는 바는 순환이다. 시간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있는 순환구조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루이스의 딸 이름인 한나(H-A-N-N-A-H)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면 시간에 대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순환"이다.

 

 "시간"은 최근 철학적인 SF영화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이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초끈이론도 포함시켜야하나) 이후 눈에 띄게 발전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여전히 인류에게 미지의 영역이며, 동시에 너무나 친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터스텔라는 중력을 통해 시간을 설명했고, 결국은 인류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컨택트도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언어를 통해 시간을 설명하며,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터스텔라가 그럴싸한 과학지식을 양념으로 뿌렸다면, 컨택트는 그런 양념은 없다. 철저히 관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도입부에 나오는 딸과의 모습은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미래의 일이다. 중간중간 루이스가 환영처럼 보는 것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인 것이다. 루이스가 외계인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자, 딸과의 장면은 더욱 구체적이 되고 뚜렷해진다. 루이스가 언어로 인해 가지고 있던 시간에 대한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언어가 아닌, 외계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루이스는 시간의 순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이스는 미래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현재는 굳이 어떤 노력이나 행위를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의 결과에 도달해야 한다. 때문에 현재의 행위는 무의미한다. 반대로, 현재의 행위로 미래가 변한다면, 현재 보고 있는 미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다. 결과가 정해져 있고, 인간은 단순히 관찰할 뿐이라는 점에서 양자역학과 연결시킬 수도 있으며, 할아버지의 역설과 함께 생각하면 타임 패러독스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루이스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설사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루이스가 읊조리는 이 문장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의미나 근원을 영화가 밝힐 수는 없다. 현실에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도 나오지 않는 해답이 영화 속에 있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무의미한 것일까. 사고를 더 확장시켜 보자. 인간의 끝은 죽음에 다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미래가 정해져있는 현재처럼 무의미한 것일까. 어차피 죽을거 뭐하러 열심히 하나라는 생각. 이 의문들에 대한 대답이 바로 위의 문장이다.

 이 영화는 언어를 통해 소통을 이야기하고, 시간을 통해 순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종착점에는 '삶에 대한 자세'가 있다. 설사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연도, 언어도, 행성도, 우주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영화 후반부에 루이스가 외계인들을 만나 보이지 않는 한명에 대해 물어본다.

 

"그는 죽음의 과정에 있다."

 

 다른 외계인의 대답이다. 시간에 대한 한계를 벗어나고,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그들에게도 죽음은 존재한다.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외계인들은 3천년 뒤의 도움을 위해 인류에게 왔다. 나아가는 것이다. 영화 컨택트는 인간이, 인류가 어떤 자세로 삶을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래에 그 어떤 일들이 있더라도, 설사 그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알게되더라도, 인간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비록 삶이 죽음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학문의 기반은 철학이라는 이야기는 진부하다. 공부를 시작하면 거의 모든 책에서 철학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과 삶에 대한 고뇌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고뇌의 근원은 무엇인가. 세상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똑똑하다는 것은 당연히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똑똑하다고해서 위대한 철학자나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똑똑함과 더불어 인류애가 있어야 한다.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것이 인류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대상을 줄여보자면 결국 자아를 완성시키고 발전시키는건 자기애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외계인이 부모이고 인류가 자식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인류가 지구라는 갇힌 세계에서 외계인을 만나면서 세계를 부수고 나오는 모습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있던 존재가 부모라는 객체를 만나 소통하고, 자기만의 틀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의 성장한 인격체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 상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다.